우리나라에서 계기지진 기록이 시작된 후 직접적으로 지진 피해를 준 지진으로 1978년 홍성지진과 1996년 영월지진, 2016년 경주지진이 있습니다.
지진계가 없었던 옛날에는 지진을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기록했을까요? 또 어떻게 지진의 크기를 결정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나라는 역사시대에도 지진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당시에 발간되었던 각종 기록물로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당시에는 지진에 대한 중요한 정보인 진앙지나 크기 등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이 “평양에서 땅이 흔들려 담장이 무너졌다”하는 식으로 피해만을 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역사지진 기록은 서기(A.D.) 2년(고구려 유리왕 21년)에서부터 1905년 계기지진 기록이 시작되기 전까지 입니다. 이들 기록은 주로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실록 등에 남아 있는데 지진 기록의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백제 온조왕 45년(A.D. 27년) 경기도 광주에서 땅이 흔들리고 사람이 사는 집들이 기울어 졌다(삼국사 기)”,“ 고려고종10년(1223년) 평양에서 땅이 크게 흔들리고 그 다음날에도 또한 같았다(고려사)”,“ 조선 중종 14년(1519년) 강원 평창에서 지진이 일어나 땅이 요동하고 놀던 꿩들이 울어댔다(조선실록)”등이 있습니다.
1905년 우리나라에 최초의 지진계가 설치된 이후 관측된 가장 큰 지진은 1980년 1월 평북 삭주에서 발생한 리히터 규모 5.3 지진이며, 1978년 9월의 리히터 규모 5.2의 속리산지진과 1936년 7월의 리히터 규모 5.0 지리산 지진이 그 뒤를 잇고 있습니다.
계기지진 기록 이후 직접적으로 피해를 준 지진으로는 1978년 홍성지진과 1996년 영월지진이 있습니다.
홍성지진은 1978년 10월 7일 오후에 발생하였는데 지진 피해는 홍성군청을 중심으로 반경 500m에 집중되었습니다. 홍성지진은 리히터 규모 5.0으로 규모에 비해 피해가 상대적으로 크게 나타났습니다. 이는 사람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 발생했고 진원의 깊이가 얕았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당시에 이 지역에서 지진에 대한 어떠한 대비도 없었다는데 가장 큰 원인이 있습니다.
영월지진은 1996년 12월 13일 오후에 발생하였습니다.
영월지진은 한낮에 발생하였기 때문에 발생 당시의 주변 상황이 비교적 잘 알려져 있습니다. 피해 내용은 주로 진앙지 부근의 10여 개의 구조물에서 균열이 있었거나 도로변에 낙석이 있었던 정도였습니다.
영월지진은 리히터 규모 4.5 정도로 대부분의 피해는 시공과 관리부실로 발생한 균열들이 지진동으로 크기가 확대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경주지진은 2016년 9월 12일 오후에 발생하였는데 리히터 규모 5.8의 본진과 규모 5.1의 전진을 가지는 디지털 관측이후로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가장 큰 지진이였습니다. 본진의 진동은 전국에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고, 진앙지인 경주지역에서는 지붕,담장,차량 파손,건물 균열,수도배관 파열 등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또한 1983년과 1993년에는 일본 부근의 해저지진으로 인해 지진해 일이 발생하여 동해안 일대에 인명과 재산피해를 가져온 사례가 있었고, 2004년 5월 29일에는 울진에서 80km 떨어진 해상에서 리히터 규모 5.2의 지진이 있었으나 다행히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 발생 하여 피해가 전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지진해일
바다 밑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생기는 어마어마한 파도를 지진해일이라고 합니다. 지진해일이 처음 시작될 때는 눈에 띄지도 않고 바다 위에 떠있는 배도 그냥 지나가므로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먼 거리를 건너 해안에 다다를 때는 엄청난 양의 물로 바뀌어 건물, 배 심지어 마을 전체까지 휩쓸어 버릴 수 있습니다.
현재의 과학기술로 지진 발생을 예측해 내기는 어렵지만, 먼 거리에서 발생한 지진해일에 대해서는 해일 도착 시간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지진 발생 후 해일이 발생할 것인가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찾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므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국내의 경우 기상청에서 지진해일 발생 가능성이 있을 때 지진해일특보를 발표합니다.